[소리바다이야기③] 국내 통신사가 진정 원했던 것은 무엇?
지난 연재에서는 애플이 구현한 모바일생태계를 다뤘다. 이번에는 국내 통신사들이 추구한 그림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다뤄보자.
언뜻 보기에 제조사인 애플과 통신사를 수평 비교하는 게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내 모바일 시장의 특성을 감안하면, 애플과 국내 통신사는 충분히 비교할 만 하다. 왜냐하면 해외 모바일시장은 애플, 노키아, 삼성과 같은 제조사가 주도하고 있는 반면, 국내 모바일시장은 SK텔레콤, KT와 같은 통신사들이 거의 전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대로 스펙다운
먼저 살펴봐야 할 부분은 통신사와 제조사간에 벌어지는 일명 '스펙다운'에 관한 것이다. '스펙다운'이란 특정 모델의 휴대폰이 국내시장에 들어올 때 일부 기능이 제거되거나 제한되어 해외시장에서 유통되는 제품과 차이가 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대부분 '갑'인 이동통신사들이 '을'인 제조사에게 납품의 조건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런 스펙다운의 단골메뉴는 단연 '무선랜'이다. 요즘 한창 광고하고 있는 '뉴초콜릿폰'을 비롯해 국내외 화제를 뿌렸던 '투명폰' 등 웬만한 국내용 제품엔 무선랜이 빠져 있어서 누리꾼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광고에서는 인터넷을 비롯해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나오지만, 이 모든 것을 국내에서는 무선랜이 아닌 데이터통신을 이용해야만 한다. 물론 데이터통신 매출을 높이기 위한 이통사의 전략이다.
그러나 통신사의 근시안적 매출 증대 전략으로 등을 돌리는 소비자들의 숫자만 늘어나고 있다. 양정환 소리바다 대표는 이런 전략이 소비자에게 비용을 부담시킬 뿐만 아니라 불편까지 강요하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무선랜이 되는 공간에서는 3G 데이터망보다 무선랜이 훨씬 빠릅니다. 돈 몇 푼을 떠나서 네티즌들이 무선랜을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휴대폰은 와이드폰이다 뭐다 해서 인터넷하기도 좋고 동영상 보기도 좋게 만들어놓고서는 망은 불편한 걸 쓰라는 겁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면서도 휴대폰은 또 사기 원합니다."
<국내외 투명폰 제품의 스펙 비교 예시(출처 : 터치모바일)>
앞서도 살펴봤지만, 앱스토어를 본 따 SK텔레콤이 내놓은 티스토어도 마찬가지로 무선랜 자체를 사용할 수 없게 돼 있다. 거기서 광고하는 어플리케이션의 가격은 기껏 2,000~3,000원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정액제를 통하지 않고 다운로드 받았다가는 적게는 몇 만원에서 많게는 수십만원의 통신료를 내고 써야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잘 아시겠지만, 정액제를 모르고 콘텐츠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면 대형사고를 치는 셈이 됩니다. 사실 데이터정액제라는 것도 자세히 살펴보면 할인율을 적용해준다는 거지 무제한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자기 앞으로 나온 고지서를 인터넷 카페에 올려놨는데, 요금이 1억원이 넘게 나왔다고 하더군요. 거기에 할인율 구십몇 퍼센트를 적용해 얼마를 부과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정액제 할인율을 적용하지 않았다면 1억원이 넘는 요금을 내야 한다는 것인데, 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요금체계입니까."
이런 비상식적인 요금 구조는 당장의 이통사 수익구조를 좋게 만들어줄지 몰라도, 조금만 길게 봐도 시장을 위축시키는 독소 역할을 한다. 앞서도 양대표가 언급했듯이 사용자들이 '이용해서는 안 될 서비스'로 낙인 찍고, 아예 발길을 끊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이통사의 수익 구조도 소수의 정액제 회원과 '실수로 데이터망을 이용한 사람'에 의존하는 모델이 될 수밖에 없다. 이통사 데이터서비스에 대한 양대표의 평가는 신랄하다.
"비즈니스모델 자체가 굉장히 잘못됐습니다. 시골 할머니나 어린 아이들처럼 이동통신환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실수나 무지를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발상 아닙니까? 상식적이지도 않고 도덕적이지도 않습니다."
콘텐츠사업에 뛰어든 망사업자
이통사가 매출신장을 위해 추구한 것은 스펙다운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망을 가진 통신사가 콘텐츠사업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비유하자면 대형 할인매장들이 일제히 라면을 직접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는 말과 비슷하겠다.
물론 지금도 몇몇 할인매장에서는 PB(Private Brand, 자체브랜드) 방식으로 라면을 팔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소기업 상품을 저가에 납품 받아 자기 브랜드만 붙인 것이지 할인매장이 직접 라면을 생산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만약 국내 굴지의 할인매장이 농심이나 삼양 같은 대표적인 라면회사를 인수한다면 어떻게 될까? 할인매장이 소유한 특정 라면이 훨씬 잘 팔릴 수 있도록 매대 배치와 마케팅 등에서 특혜를 주지 않을까?
그런데 통신사의 콘텐츠사업 진출은 라면으로 상상해본 것보다 훨씬 심각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라면이야 할인매장 아니어도 팔 수 있는 유통 통로가 제법 있지만, 디지털콘텐츠는 통신망이 아니면 유통될 수 있는 채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콘텐츠 유통에 관한 한 망사업자는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 양대표의 말이다.
"망사업자가 콘텐츠사업까지 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돼 있습니다. 왜냐하면 망사업자는 본질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어서 얼마든지 시장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죠. 자기 망에 결합된 자사 서비스에 특혜를 줄 수도 있고, 타사 서비스에는 진입장벽을 얼마든지 높게 쌓을 수 있습니다."
통신사가 콘텐츠사업에 뛰어든 최초의 신호탄은 SK텔레콤이 2004년 11월에 내놓은 음악서비스 '멜론'이다. SK텔레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듬해 당시 최대 음반유통사였던 '서울음반'을 전격 인수했고, 뒤이어 영화사 'IHQ'의 2대 주주가 되는가 하면, 애니메이션 제작사였던 '인디펜던스'를 인수해 본격적인 수직계열화에 나섰다.
통신사의 콘텐츠사업진출은 '저인망식 경영'
SK텔레콤에 위기의식을 느낀 KT도 경쟁적으로 콘텐츠 기업 인수와 투자에 나섰는데, 영화사 '싸이더스'는 인수했고, '쇼박스'에는 투자를 진행했으며, 이후에는 음악제작사 '도레미미디어'를 인수한 '블루코드'를 인수해 자사 서비스인 '도시락'과 연계시킴으로써 제작부터 서비스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만들어낸 바 있다.
이런 수직계열화를 통해 통신사는 '자기 콘텐츠'를 '자기 망'에서, '자기 방식' 대로 유통하고 있다. 통신망을 가지고 있는 거대기업들이 '벨소리'와 '통화연결음' 같은 자잘한(?) 사업을 직접 혹은 자기 계열사를 통해 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대기업들이 돈 되는 사업은 중소기업 영역이든 개인사업 영역이든 가리지 않고 다 뛰어든다 해서 '문어발식 경영'이라는 지탄을 받았는데, 통신사의 사업영역은 말단까지 싹쓸이한다는 점에서 '저인망식'이라고 불러 줄만 하다.
이처럼 통신사의 지위가 강해지면서 망사용을 기준으로 한 '콘텐츠 수익 분배구조'에 심각한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망사업자가 망을 제공하는 대가로 너무 많이 가져가는 것이다.
음악을 예로 들면 '벨소리 다운로드'와 '통화연결음 서비스' 등에서 발생한 매출의 50% 가까이 혹은 그 이상을 이동통신사와 관련 계열사가 취한다. 그리고 정작 음원제작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25%, 저작권자(작사, 작곡, 편곡자)에게는 9%, 실연자(가수, 연주자)에게는 4.5%밖에는 돌아가지 않는다. 오프라인 음반시장에서 제작자에게 60% 가까이 분배되는 것과 비교하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콘텐츠서비스에서 발생하는 데이터요금은 100% 통신사 몫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있는데, 소비자가 데이터망을 사용해서 발생하는 매출은 수익분배에서 100% 제외된다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통신사의 몫이다. 만약 소비자가 음원 하나를 다운 받는데 음원가격 1,000원과 데이터통신료 1,000원을 합쳐 총 2,000원을 지불했다면, 실제 음악을 제작한 사람은 전체 비용 2,000원의 25%가 아닌, 음원가격 1,000원의 25%인 250원을 분배 받는다는 것이다.
"음악이 됐든, 게임이 됐든 그것을 만드는 데 망사업자가 기여한 것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망사업자는 콘텐츠를 유통할 수 있는 망을 제공한 대가만 받으면 되는데,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비자는 소비자 대로 불만이 생기고, 개발자와 저작권자는 그쪽 대로 불만이 쌓입니다. 이래가지고는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가 없죠.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점은 공정거래위원회도 이 분배구조에 손을 못대고 있다는 겁니다."
양대표가 지적한 공정위 문제는 2006년 12월 공정위가 'SK텔레콤이 MP3 파일과 휴대폰에 폐쇄적인 DRM을 부착해 SK텔레콤 가입자들이 멜론 이외의 다른 유료음악사이트로부터 다운받은 음악은 들을 수 없게 했다'는 이유로 시정명령과 과징금 3억 3,000만원을 부과한 사건을 가리킨다.
그러나 SK텔레콤은 이 조치가 부당하다며 취소청구 소송을 냈고, 1년 뒤인 2007년 12월 서울고등법원은 '소비자 불편이 있더라도 DRM표준화가 의무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부득이한 일'이라며 SK텔레콤 손을 들어준 적이 있다. 이에 공정위는 2008년 1월에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2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최종 판결이 언제 이뤄질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공정위도 손 못대는 통신사의 전횡
이후에도 음원제작자 등이 줄기차게 DRM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SK텔레콤의 폐쇄적 DRM 정책은 변함 없이 유지되고 있다. 최근 출시된 '뉴초콜릿폰'의 경우에도 KT폰과 LGT폰은 DRM이 풀린 반면 SKT폰은 폐쇄적 DRM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SK텔레콤이 폐쇄적인 DRM 정책을 고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전체 모바일 사용자의 50%가 넘는 최대 회원을 보유한 SK텔레콤 입장에선 소비자를 '가두는 것'이 '풀어주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월한 지위의 기업이 저인망식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은 모바일뿐만 아니라 온라인시장에서도 발견된다. 국내 검색시장의 80% 가까이를 점유하고 있는 네이버가 대표적인데, 네이버의 검색구조를 보면 최대한 네이버 안에서 트래픽이 재생산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어떤 단어를 검색하면, 인터넷 전체에서 콘텐츠를 찾는 게 아니라, 네이버 울타리 안에서 우선 찾아서 그것을 상단에 배치시키는 방식이다. 네이버를 구글과 같은 순수한 검색엔진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업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통신사들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일반 쇼핑몰이 버젓이 서비스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쇼핑' 같은 서비스를 만들어 수수료를 챙기는 방식을 취한다. 음악서비스도 다른 서비스사이트를 연결시켜주기보다는 자기 서비스를 만들어 음원판매까지 유도하고 있다.
좁은 시장에서 목숨 걸기?
이쯤 되면 '우월한 지위를 활용해 중소기업의 사업영역까지 무리하게 확장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문화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생길 정도다. 왜 우월한 지위를 가진 기업들이 함께 상생하는 큰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자기 이익을 위해 안하무인격으로 달려드는 걸까.
"전체 시장규모라 해봐야 얼마 되지 않는 좁은 나라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한정된 시장에서 이윤을 극대화하려다 보니, 무리한 사업확장 외엔 딱히 대안이 없는 것이겠죠. 보다 넓은 해외시장을 고려했다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국내 기업들은 왜 처음부터 해외시장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언어의 장벽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기왕에 국내에서 확보한 우월적 지위에 안주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얼마 전 구글코리아가 초기화면에 검색창 말고도 '이 시간 인기 토픽', '인기블로그' 등의 콘텐츠를 노출시킨 것을 두고, 혹자는 "구글이 네이버에 항복했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구글은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거의 같은 서비스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 서비스가 해외시장에 나가면 완전히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지나치게 국내 시장만 고려해서 서비스를 만들다 보니 해외시장에서는 적용하는 데 무리가 따르고, 결국 몇 번 시도해보다가 철수해버리고 마는 것이죠.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오로지 한정된 국내 시장에서 얼마나 많은 파이를 가져가느냐밖에 없습니다."
IT 분야에서 '갈라파고스 신드롬'이라는 개념이 있다.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처음 사용됐다고 하는데, 일본의 휴대폰 기업들이 최신 기능을 탑재한 휴대폰을 시장에 내놓고 있지만, 세계 시장에서는 고전하고 있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런 현상이 마치 갈라파고스 제도가 육지와 멀리 떨어져 그곳 생물들이 원래의 종과는 다르게 진화한 현상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은 모바일 선진국이다. 휴대폰 분야에서 이뤄낸 기술혁신은 눈이 부실 정도이고, 다른 나라에 비해 평균 3~4년이나 빨리 서비스상용화를 이뤄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기술수준에 도취한 나머지 국제 표준을 무시했고, 결국 세계 휴대폰 시장의 섬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일본처럼 큰 규모의 내수시장을 갖고 있지 못한 우리나라 모바일시장이 극소수 통신사의 힘에 휘둘려 폐쇄적인 정책을 고집하게 된다면, 과연 2~3년 뒤 갈라파고스 쯤이라도 될 수 있을까? 이미 우리나라는 10여 년 전 'IT 선진국'에서 2009년 현재 '모바일 후진국'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국내에 아이폰이 출시된 사실을 두고 월스트리트저널이 "한국이 이통사를 보호하기 위해 쌓았던 스마트폰의 무역장벽을 이제야 철폐했다"고 표현했다 하니 우사도 보통 우사가 아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통신사들의 힘이 이렇게 세졌을까? 휴대폰 제조사들이 알아서 스펙다운을 하고, 콘텐츠 제작자들이 적게 받아도 아무 소리 할 수 없게 만드는 이런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월스트리트저널의 분석처럼 정부가 통신사를 보호해줬기 때문일까? 그런데 막상 정부 담당자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도 통신사의 독주를 막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답변이 돌아오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망사업자에게는 일정한 규제가 있어야
이에 대한 답은 '첫 단추를 잘못 꼈다'로 보면 될 것 같다. 통신사의 전횡을 막으려고 했으면, 2004년에 통신사들이 일제히 콘텐츠사업에 뛰어들 그 당시에 막아었야 했다. 그런데 당시 여론을 살펴보면, 통신사의 콘텐츠사업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많았지, 우려하는 목소리는 크게 들리지 않았다. 왜 이런 분위기가 형성된 것일까?
"통신사들이 콘텐츠사업에 뛰어들 때 정부에서는 환영하는 분위기가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정부가 문화산업을 정책적으로 밀고 있었는데, 시장상황은 전혀 체계적이거나 산업적이지를 못했거든요. 통신사와 같은 거대기업이 들어와주면 시장이 자연스럽게 산업화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한 것 같습니다."
양대표의 말대로 당시는 참여정부 시절이었고, DJ의 국민의 정부시절부터 이어온 '문화산업을 통한 부국론'이 한창 힘을 발하던 시기였다. 우리나라에서 문화산업이 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육성되기 시작한 게 1998년쯤이었는데, 2004년이 되도록까지 게임 분야를 제외하면 제대로 산업이라 할만큼의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문화산업이 과거 모 아니면 도 식의 흥행사업 색깔이 강했고, 그러다보니 산업적인 체계를 갖추기보다는 한 번 치고 빠지는 식의 주먹구구식 경영이 여전히 횡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삼성그룹이 한번 실패를 경험한 바 있는데, 통신사들이 다시 뛰어들겠다고 하니 정부로서는 충분히 반가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이후 콘텐츠시장에 압도적인 강자가 등장하게 되었고, 그 강자는 기대와는 달리 시장을 합리화시키기보다는 사유화하는 데 힘을 쏟는다.
양대표는 바로 이런 것들 때문에 망사업자에게는 일정한 규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망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공공재'로 봐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KT가 가지고 있는 전화망이 과연 KT 것일까요? 단지 그 망을 가지고 사업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가 준 것 아닙니까? 이동통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가 여러 가지 심사와 평가를 거쳐서 몇몇 업체를 선정해 사업을 펼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지 그게 오롯이 통신사의 자산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통신사가 그 권한을 사유화하려고 할 경우 일정한 규제가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글의 'Don't be evil'이 새삼스러운 이유
국내 통신사들이 이제 더 이상 공기업이 아닌 마당에 자기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을 두고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망이라는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업자가 저인망식으로 사업을 확장해 기존의 중소사업자들에게까지 타격을 주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정부가 태도를 바꿔 통신사를 규제할 것 같지는 않다. 설사 규제할 수 있다 해도, 그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양대표는 해당 시장에서 국내 통신사와 유사한 독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구글의 예를 들었다.
"구글의 모토가 'Don't be evil.'입니다. 자기들이 소유한 정보와 네트워크를 활용하면 얼마든지 시장을 자기 맘대로 지배하며, 기존 사업자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최소한 지금까지 구글이 보여준 행보는 자기의 모토에 충실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구글의 검색시장 점유율은 거의 80%에 달한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지구상의 모든 정보를 디지털화하겠다'는 원대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2004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전자책 사업인데, 책 가운데 굴곡진 부분을 스캔할 때 자연스럽게 펴주는 기술을 자체 개발해 특허를 낼 정도로 열성을 쏟고 있다. 구글의 이런 사업에 대한 양대표의 평가는 후했다.
"인류의 문화자산을 모두가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구글의 시도는 높이 평가받을 만합니다. 이런 프로젝트는 정부가 나서서 할 수도 없고, 정말 구글쯤 되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저작권이 잘 해결돼야 하는데, 전자책이 활용되면서 발생하는 수익이 적당한 수준에서 권리자에게 돌아갈 수 있는 규칙만 마련된다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구글은 저작권이 만료된 책을 우선적으로 디지털화하고 있고, 지난 2008년에는 미국 저작권협회, 출판협회와도 협상에 성공해 권리자의 사전 허락 없이 디지털화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때의 협상 내용은 아래와 같다.
ㅇ 구글은 저작권협회에 1.25억 달러를 제공하고 도서권리등록기관(Book Rights Registry)를 운영한다.
ㅇ 미국 작가협회와 출판사협회 소속회원들은 자기가 원치않을 경우를 제외하고 여기에 자동 등록된다.
ㅇ 여기 등록된 저작물은 개별 허락 없이도 검색하거나 온라인판매를 주선할 수 있다.
ㅇ 대신 여기서 발생하는 광고와 판매 수익의 60%를 저작권자에게 제공한다.
위 협상의 핵심 포인트는 디지털화를 통해 발생하는 수익의 60%를 권리자에게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비록 이 사업을 시작할 때는 저작권 침해 문제로 법정 다툼까지 벌어졌지만, 구글은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규칙을 제시함으로써 협상에 원만하게 성공한 것이다. 양대표는 구글의 이런 모토가 자기 사업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저는 구글의 이런 모토가 단순히 경영자의 윤리의식 때문에 나왔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구글은 기본적으로 정보의 교류를 통해 수익을 내는 기업입니다. 이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파트너가 필요합니다. 만약 어떤 식으로든 구글의 행동이 시장에 악영향을 주고, 다른 사업자의 영역을 갉아먹는다는 인식을 주게 된다면 과연 훌륭한 파트너가 생길까요? 파트너가 없으면 결국 자기의 사업목표도 달성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구글은 자기의 강점과 사업목표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지혜롭게 대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구글이 무섭고, 또 생각보다 오래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애플 또한 아이폰을 중심으로 모바일생태계를 만든 것이 단순히 개발자들의 처우를 개선해주려는 선심 때문이 아니었다. 애플의 사업목적과 부합했기 때문이다.
"애플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하드웨어인 아이폰을 많이 파는 것이죠. 그런데 애플은 다른 휴대폰제조사와는 달리 하드웨어를 잘 팔 수 있게 만드는 환경, 즉 생태계를 잘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휴대폰을 둘러싼 환경, 즉 소프트웨어와 콘텐츠 등을 활성화시켜줘야 휴대폰도 자연스럽게 잘 팔린다는 걸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거죠."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펴본 국내 통신사의 비즈니스 전략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구글의 'Don't be evil'에 비교한다면 'Be evil'쯤 되지 않을까? 물론 기업 경영의 문제를 선악의 문제로 단순하게 치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움' 대 '어리석음', '안목 있음' 대 '안목 없음', '함께 잘 살려는' 대 '혼자 독식하려는'의 차이로는 얼마든지 비교해볼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 통신사들은 엄청나게 좋은 환경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고정된 회원만 천만명을 넘게 가지고 있다. 이 정도 인프라에 이 정도 회원, 그리고 정부의 규제도 느슨한 마당이면, 정말이지 못해볼 사업이 없다. 그런데 그 좋은 조건을 가지고 오로지 울타리만 치려고 들고 있다.
"통신사들은 그동안 우월한 지위를 활용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것은 권리자들에게는 희생을, 소비자들에게는 불편을 강요하면서 쌓은 부입니다. 그 정도 했으면 이제 소비자의 호주머니를 더 이상 탐할 게 아니라,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진짜 매출은 해외시장에서 벌어와야 하는 것 아닐까요?"
아이폰의 국내 출시 이후 통신사의 폐쇄적 비즈니스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더구나 아이폰 효과로 똑똑해진 누리꾼들이 세계 디지털시장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하며, 블로그로, 트위터로 퍼나르고 있다. 이는 통신사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음을 뜻한다.
(다음은 '소리바다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위 내용은 내년 '소리바다 10주년'을 계기로 필자가 양정환 대표와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앞으로 본격적인 소리바다 이야기에 들어가, 서비스 탄생의 배경과 분쟁의 뒷얘기, 그리고 디지털음악시장의 미래에해 두루두루 다룰 예정입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필자 아룀).